“다 모인 거 맞냐? 다 가면 쓰고 오기로 한 거 맞지?”
“아, 잠깐만, 나 이제 왔다! 미안!”
“얌마 너 왜 이리 늦게 와!”
“쉿!”
조금만 목소리를 높여도 이런 공간에서는 금방 소리가 울려퍼지기 마련이었다. 로비로부터 깊숙이 아래쪽으로 떨어져 있는 지하실이었고 접근하지 말라는 샛노란 플라스틱 입간판까지 문 앞에 세워뒀다지만, 괜히 소란을 피워 의심을 살 이유는 없는 노릇이었다. 거사의 완성이 코 앞이었다. 일을 망친다면, 전직 격투기 선수 출신이라는 그 망할 키즈 행동대장이 얼마나 털어댈지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단순히 기합 정도가 아니라, 이번엔 진짜로 어디 묻을지도 모른다고!”
“아 알지 알지. 그 갑자기 전화가 와서...”
“뭐, 전화? 설마 큰 형님한테서 온 거냐?”
“아니. 보험 들지 않겠냐던데.”
“이 새끼가 장난 까나! 지금 별 쓰잘데기 없는 광고 전화 때문에 일을 쌩까려고 했다, 이 말 아냐?!”
“아 좀! 목소리 좀 낮추라니까!”
쉿! 4명 중 한 명이 낸 쇳소리가 한 번 더 지하실에 진동했다. 귓가에는 영양가 없는 언쟁으로 인한 불협화음, 코에는 지하실의 축축한 곰팡이 내음과 리얼한 색깔만큼이나 퀴퀴한 싸구려 라텍스 냄새가 각각 진동을 했다. 멱살이 잡힌 비둘기 복면을 제치고, 그 멱살을 잡은 돼지 복면에게 수탉 복면이 달래듯이 손바닥을 위 아래로 휘저었다.
“이유야 어찌됐던 간에, 이번 일 망치면 큰 형님이 가만 안 둔다고 하셨던 거 기억 안 나냐? 다 모였으니까 내려가자. 이제 해야 할 일은 딱 하나만 남았다구.”
점잖게 말리는 수탉의 말에 돼지가 거친 숨은 여전하지만 어느 정도 노여움이 풀린 목소리로 지시했다.
“좋다. 그래. 오늘 일 딱 하나만 끝내면 여기 뜬다.”
“진짜 쌍소리가 저절로 나오더라. 이왕 위장 잠입시켜줄 거 좀 끝까지 제대로 시켜줄 것이지. 호텔 직원 옷만 덜렁 내주고, 직원 카드는 없어서 숙소가 아니라 비품 창고에서 몸 욱여넣고 지낸 거 누가 들으면 웃겠네.”
“말단의 비애라는 게 이런 거 아니겠냐. 아, 야. 지금 이거 우리 서로 말 안 한 거고 못 들은 거로 해야 한다. 위에 인간들 뒷담 깠다는 거 알면...”
돼지가 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뒤에 나란히 서 있던 세 명이 침묵했다.
“크흠, 흠. 전 아무것도 못 들었다.”
“무, 무, 무슨 말 했나 우리가.”
“쉿.”
“그래, 바로 그 자세지. 지금부터 내려가는데 그 전에 최종점검 간다. 각자 들고 온 준비물, 다 들어.”
돼지의 명령이 떨어지자 세 명이 일시에 양손을 가득히 잡고 들어 보였다. 수탉은 공구 상자를, 비둘기는 한 품에 버겁게 안기는 가죽 가방을,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던 상어는 한 손에 잡히는 스위치를 각자 맡고 있었다.
“다들 잘 챙겨라.”
돼지는 자신이 손수 만든 지도를 꺼내서 펼쳤다. 그들은 모두 이 호텔의 가스가 지나가는 배관선이 어지럽게 놓인 지하로 향했다.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음습한 냄새가 더욱 강해졌다. 그들이 뒤집어 쓴 복면은 할로윈이랍시고 마트에서 안 팔리던 재고를 헐값에 내놓은 것이라서, 순탄하고 쾌적한 호흡에는 전혀 기여하는 바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무거운 사제 폭발물의 무게와 난방도 냉방도 닿지 않는 구역의 온도 때문에 대화마저 사라졌다. 밝고 아늑해 보였던 1층의 로비와, 그 위에 있을 화려한 객실과는 대비되는 아래. 그 원통형의 풍경의 가장자리를 빙 두르는 철제 난간과 시멘트 계단을 건너고 건너고 또 건너서, 마침내 몇 달 전 비뚤비뚤하게나마 그린 이 호텔의 지하도에 유성 마커로 x 표시를 친 지하 가스 배관 중 한 곳에 그들은 도착할 수 있었다. 주저앉은 돼지가 부산스럽게 요란을 피웠다.
“하 씨, 거 더럽게 길 한 번 기네!”
“이거 설치하는 데 몇 분 걸리지?”
“설치하는 데 이 정도, 그리고 폭발이랑 전혀 상관없는 범위까지 벗어나기까지는 이 정도.”
“분? 아니, 시간이냐?”
“첫 번째는 분이고 두 번째는 시간 맞아.”
돼지가 비대한 몸을 시멘트 계단에 철푸덕 끌어내려 앉아 헉헉대는 동안, 그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은 수탉이 비둘기와 상어와 함께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비둘기는 설명과 함께 손가락을 각각 3과 1을 펴 보였다. 곧바로 비둘기의 가죽 가방을 상어가 뺏듯이 열어 보았다.
“야, 야, 살살 다뤄! 그거 폭탄인 거 잊었냐?!”
“아직은 아니지. 이걸 3분 안에 설치... 아니 조립이 가능하다고?”
“어? 3분 아니고 30분이라고 한 건데.”
“너 속 터지게 굴래? 호텔 폭파시키기 전에 누구 홧병으로 터지게 하려고 작정했나.”
“그, 금방 끼워 맞출 수 있어, 짜샤! 나 못 믿냐? 그리고 넌 뭘 아직도 그러고 있어?! 가서 망이나 봐!”
“지 갈군다고 화풀이 하는 거 봐라.”
가죽 가방 안의 조각 조각난 부품들을 급하게 비둘기들이 우루루 바닥에 쏟아두고 하나하나 조립하기 시작했다. 성질이 서서히 나기 시작한 수탉은 곧 별 수 있냐는 듯 주저 앉아 폭탄을 끼워 맞추기 시작했고, 돼지는 전혀 도울 생각이 없는 듯 그 광경을 벽에 기대어 턱을 괴고 멀거니 감시하듯 지켜보고 있었다. 굉장히 작은 조각들을 복면 안에서 진땀을 흘리며 끼워 맞추기 시작한 비둘기가 별안간 상어에게 화풀이로 넌 망이나 봐! 하고 쫓아낸 후, 폭탄이 반쯤 조립되었을 때였다.
“야. 근데 왜 하필 이 호텔을 날리라고 한 걸까?”
폭탄이 완성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비둘기는 또 다시 긴장이 풀렸는지 궁금했던 걸 물어보았다.
“낸들 자세히 알겠냐? 너나 나나 말단인데. 근데 듣자니까, 우리 조직이 이 도시에 꽤 원수진 게 있는 모양이야.”
“엥.”
“좀 손이 큰 형님들이 일본 쪽에서 고생고생해서 들여오고 파는 물품들이 있었는데 그걸 여기 비돌까지 유통망을 뚫으려고 했대. 근데 어떻게 눈치를 챈 건지 몇 달 전에 빠따를 든 또라이가 우리 항구 쪽 컨테이너들을 다 쓸어버렸다는 거야.”
“헐.”
“빠따? 내가 듣기로는 발차기로 다 쓸렸다던데.”
“아 그니까 나도 모른다고. 윗선에서 제대로 안 알려줬잖아. 어쨌거나 한 놈한테 그렇게 털린 게 쪽이라도 팔렸는지. 그나저나 니는 계속 그러고 앉아 있을 거냐?”
“야 이 씨, 내가 짬밥이 몇 년인데 그 딴걸 해야겠냐! 니들 농땡이 치는지 안 치는지 제대로 본다.”
“예, 예. 어쨌거나 그 일 때문에 상권 확장은 물 건너 갔고, 원래 팔던 곳에 팔려한 재고도 다 떨어져서 이를 부득 부득 가는 상황이었단다. 뭐 다른 건 말 안 해도 알겠지.”
“그러니까... 이거 복수라는 거지?”
“경고지, 경고.”
그럴듯한 모양을 갖추어 가는 폭탄이 비둘기의 손에서 수탉의 손으로 넘어가고 (그걸 왜 거기다 끼워!) 다시 수탉의 손에서 비둘기의 손으로 넘어갔다 (아 맞다고 알긴 개뿔이 니가 아냐!)를 반복하고 있었다.
“때려쳐. 싸워서 뭐해. 재밌는 거나 한번 지껄여 봐.”
“지친다 그래. 그럼 이건 어때.”
“뭐.”
“괴담.”
“뭐?”
이제 모서리의 부품만 맞추면 완성이었다. 허전한 테두리를 만지작거리면서 비둘기가 기묘한 서두를 떼는 것에 수탉이 말꼬리를 높이며 되물었다. 그러자, 비둘기가 괜히 목소리를 낮추면서 이야기를 했다.
“이 호텔에, 괴담 하나 있잖아.”
침을 꿀꺽, 삼키면서 비둘기가 말을 이어갔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 이 호텔에 아무도 안 쓰는 방이 하나 있대. 13층에 1301호. 방 문고리에 거는 ‘사용 중, 방해 금지’라고 쓰인 그 종이 팻말 알지? 그게 주구장창 걸려있다는 거야. 근데 문제는 그거지. 누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그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도 아무도 본 적이 없대. 이게 무슨 말이겠어. 그게 진짜 빈방이라면 그건 누가 걸어놓은 거고, 그걸 걸어둔 이유도 알 수 없지! 야, 그리고 들어봐. 나 이번에 잠입할 때 카운터 쪽 직원으로 들어갔잖아? 일단 일을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니까 컴퓨터든 쓰는 기록이든 다 만져야 했단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진짜로 13층 방 중에 유독 칸이란 칸이 다 비어있는 호실이 있었단 말이지. 기록이 하나도 없어. 전산에도 그 호실에 누가 예약한 기록, 묵고 있다는 기록도 없고, 손으로 쓰는 장부에도 입실 요금도 스테이 요금 납부 기록도. 전혀! 이상해서 그 전의 기록도 다 봐버렸는데.
“몇 달 전에도, 몇 년 전에도, 심지어는 이 호텔이 처음 세워졌던 때에도. 그 호실에 관한 기록은 아예 제로야, 제로.”
말하면서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상식의 영역 밖에 있는 이야기에 화자인 비둘기의 목소리가 점점 더 격양되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번엔 시끄럽다고 돼지나 수탉이 면박을 주지는 않았다. 상어는 계단 문 쪽에서 망을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가면의 주둥이 부분이 문 쪽으로 향해 있었다. 수탉은 가만히 듣고 있다, 자신의 손에 들려 있었던 폭탄을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비둘기에게는 놀랍게도 그의 목소리는 꽤나 긴장된 목소리였다.
“야... 듣고 나니까 나도 하나 기억나는데.”
“헉, 뭔데, 뭔데.”
“난 이번에 CCTV 쪽 인력으로 잠입했잖아. 2층에 식당 쪽 CCTV. 객실 복도 쪽은 6층부터 13층까지 각각 한 층씩 한 명이 본다 하대?”
“근데?”
“거기서 말을 좀 트고 지낸 객실 복도 담당 하나가 이야기를 해주더라. 자기도 들은 얘기라면서.”
한 달 전이었대. 그러니까 9월쯤에, CCTV로 복도를 쭉 둘러보는데, 한 방 앞에서 누가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 발이 박혀버린 것 마냥 서 있기만 하더라는 거야. 이상해서 들여다봤더니 후드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CCTV에 잡히는 각도로는 그저 뒷모습밖에 안 보였대. 더군다나 방 문고리에는 ‘사용 중, 방해 금지’ 팻말까지 걸려있었으니 더 기묘했겠지. 안 그래? 그 방의 투숙객인지, 그 방에 볼일이 있던 건지, 아님...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놈은 한참을 그러고 서 있었는데...
“그래서 그 다음은?”
“이 다음은... 없어.”
“뭐? 그게 뭐야?”
“그 때가 딱 교대 타임이었대. 근데 들어 봐. 이 뒤에가 더 수상하니까.”
다음 사람이랑 교대하면서 ‘내일 이 시간대 영상 꼭 돌려봐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퇴근했대. 당연하지 않냐? 궁금하잖아. 그러고 다음 날 출근했는데, 뭐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 알아?
편지봉투였대. 그냥 편지봉투도 아니고, 이 호텔 마크가 찍혀진 금박 장식된 봉투. 왁스인지 녹여서 인장까지 제대로 찍혀있는 거. 시커먼 기계 사이에서 그런 게 있는 게 걔는 너무 어정정쩡해 보였고 그래서 더... 섬뜩했대. 퍼뜩 뜯어보니까, 뭐라 써져 있었게?
<어제 xx시 xx분 경부터 xx시 xx분 경까지 목격한 정보는 모두 잊어주십시오.> 라는 편지내용이랑 소정의 사례금이 월급 넣어주는 계좌로 입금되어있다는 추신.
“그 놈이 당장 계좌부터 확인했는데 말이 소정이지 월급의 서너배는 되는 금액이었대.”
“야, 그건...”
“뭔가 입막음할 게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
“경고네 경고.”
“그거 말고 생각될 게 또 있나.”
“어우 찝찝해. 으.”
어깨를 한번 툭툭 털어낸 비둘기가 자, 여기. 라는 말과 함께 수탉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완성시킨 폭발물을 건네주었다. 수탉이 공구 상자를 열었다.
“이거 완성된 거 보니 아까보다 30분은 지났단 말이지?”
“사실, 네 얘기 내 얘기 하는 시간까지 합치면 30분에 플러스 몇 분은 해야 해.”
“됐어. 어쨌건 간에 오늘 내로 날리면 그만이잖아.”
“그건 그래. 내 일은 끝!”
“이젠 내 차례다. 이거 벽에다 대고 박아놔야지.”
“난 계단 쪽에 저거 저 놈 좀 일으켜주러 가야겠다. 저 자식은 할 일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면서 정작 농땡이는 지가 다 까고 있잖아.”
“한 명이 다 맡으려면 걸릴 위험이 커서 각자 일을 나눠 맡기로 했지 그래. 너는 폭발물 제조, 나는 그 폭발물 설치. 그리고 저기 있는 두 놈 역할이 뭐였더라?”
“계단에 퍼질러져 있는 놈은 여기 진입로부터 안 걸리고 나갈 도주로 파악, 그리고 한 놈은...”
손가락을 하나 하나 접어가며 몸을 일으키려던 비둘기는 순간 그 자리에서 굳었다.
“뭐야. 왜?”
“...야, 나머지 한 놈이 맡은 역할이 뭐더라?”
“쟤 스위치 들고 있었잖아. 우리 다 빠져나가면 쟤가 폭파시키는 거 아니었어?”
“아니... 아니. 잠깐만. 분명 폭파도 우리 할 일이었긴 했는데.”
그건 막판에 다 같이 누르기로 하지 않았어? 피날레니 뭐니 하면서... 수탉은 비둘기의 말을 듣고 벽에다 대고 못질을 하던 손을 멈췄다. 그 때 분명, 돼지 복면 아래의 놈이 제멋대로 지껄여댔다. ‘막판 장식은 다 같이’라면서 스위치는 모두 다 함께 누르자고. 지 혼자 또 떠든다 싶어 좋을 대로 하라고 내버려 둔 탓에 뇌리에서마저도 한구석에 처박아뒀던 기억이 그제서야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비둘기와 수탉은 곧장 눈이 다시 마주쳤고, 동시에 내려온 계단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돼지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복부를 상어가 다리 하나를 들어 그대로 내려찍은 채로 둘을 응시하고 있었다. 상어의 한 손바닥 손아귀에서 기폭 스위치가 무참하게 ‘콰직’하는 소리를 내며 구겨져 갔다.
“너, 너 누구야!!”
“야 이 새꺄, 너 뭐야!”
공구 상자에서 순식간에 쇳덩이들을 잡아채서 달려드는 비둘기와 수탉을 보면서, 상어는 신고 있던 부츠의 단단한 밑창으로 밟고 선 살덩이의 부피를 한 번 더 짓누르며 발이 향하는 각도를 바꿨다. 그리고 지하실에서 울려 퍼지는 건 금속이 인간의 골격을 타격하는 소리가 아닌, 원래라면 금속보다 가벼워야 할 소리가 더 묵직하고도 간결하게 꽂히는 괴물같은 소리였다.
눈 깜짝할 새에 명치를 부서질 듯한 통증으로 뒤덮어야한 둘이 그대로 계단 아래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이미 비둘기는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어 꺽꺽댔고, 수탉은 겨우 목소리만 쥐어 짜낼 수 있었다.
물고 늘어져야 한다. 기어가려고 계단 위에 손을 올려둔 수탉은 뭔가 자그마한 플라스틱과 금속이 손바닥 안에 잡힌 것을 느꼈다.
“?”
그대로 쥐고 손바닥을 뒤집어서 보았다. 하얀색을 메인컬러로 내세우는 이 호텔의 마크와 특유의 인쇄체로 새겨진 1301호 키가 시야에 담겼다.
“...”
고개를 들어보면 상어의 주둥이가 자신을 향해 있었다. 무릎을 굽혀 내려다보던 1301호의 주인이 속삭였다.
쉿.
*
엘리베이터가 13층에 멈춰 섰다. 열린 문에서 나온 남성은 자신의 방을 향해, 무거운 부츠 소리를 아래에 깔린 기하학무늬의 털 카펫에 묻으면서 걸어갔다.
검은 광택의 레더 블루종을 입은 어깨를 우득, 소리가 나게 돌리며 마침내 그는 한 방문 앞에 멈췄다. 방의 문고리에는 ‘사용 중, 방해하지 말 것.’이라고 깔끔하게 인쇄된 DND 카드가 걸려있었다. 복도를 걸으며 내내 오른손으로 던졌다, 받았다 장난을 친 1301호의 열쇠가 문의 구멍에 끼워졌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돌아간 방문은 경박하지 않게 그 어떤 소음도 내지 않고 천천히, 서서히 열리며, 1301호의 흰 조명을 복도 밖으로 쏟아내었다. 그가 방으로 한 발 내딛는 순간, 날카로운 타박도 현관으로 하나 내밀어졌다.
“왜 이렇게 늦었어?”
새하얀 적막을 깬 것은 1301호의 소파에 앉아 있던, 검은 후드를 머리끝까지 뒤집어 쓴 자였다. 불만 반, 냉정 반. 쏘아붙이는 말에 담긴 음색을 파악한 1301호의 투숙객은 문을 잠그고 나서 자신이 쓰고 있던 상어 복면을 찢을 기세로 당겨서 벗었다. 후, 이제 숨 좀 쉬겠네. 이전에 방독면은 애당초 숨을 쉬라는 의도에 맞춰 만들어진 물품이었기에 쓰고 다녔다지만. 이건 그냥 정말 머리에 뒤집어쓰라는 너무나도 흐릿한 사용 목적에 더해 정체 모를 짓에 쓰여도 상관 없다는 듯이 시장바닥에 내던져진 물건이었다. 짜증이 나서 땀에 젖어 앞으로 넘어온 머리카락을 대강 뒤로 빗은 그는 곧장 소파로 향하여 앞서 앉아 있던 사람의 옆에 착석했다.
“새끼들 입이 너무 예상 밖이었다고 할란다. 뭐가 그리 말이 많아. 지하로 진입하기까지 예상보다 10분이나 더 걸렸던 거 아냐?”
“10분? 예상못한 사고라도 있었어?”
“변수였지, 변수. 새끼 스팸 전화면 적당히 씹을 것이지. 괜히 시간만 더 끌었네.”
“너 원래라면 그것까지 다 계산 못했다고 마이너스 요소 되는 거, 알지?”
“쯧...”
못마땅해서 혀는 찼지만, 거기까지였다. 별 다른 반박거리가 땡전 본인에게 없었기 때문이다. 신도림의 핵심세력, 지금은 전향 희망자.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면 이 정도 대접도 호사였기에, 눈 앞에 있는 이에게 더욱 더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다. 검거를 망친 건 아니었지만 사소한 실수가 원래 더 짜증나는 법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곱씹어지기 마련이었다.
그가 짜증 나는 이유 중 하나를 단연 꼽자면, 아까 잡은 놈들은 너무나도 허술했다는 점이 컸다. 서로 팀워크가 철저하게 잘 맞는 것도 아니었고, 계절 하나가 소비되는 장기 계획을 잡고도 근거지를 따로 마련할 생각도 없이 비품 창고에서 지낸 태만함에, 폭탄의 경우 전문가가 아닌 자신이 보아도 부품들이 하나 같이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이런 허술한 놈들한테 시간을 몇분씩이나 뺏겨? 자기 계획대로였다면 이미 십분은 더 전에 천둥이 기다리는 1301호로 돌아와 있어야 했다. 속이 끓어오르는 것도 잠시, 땡전은 갸름하게 자리 잡은 옆얼굴 선을 바라보았다.
“대신에 이걸로 추가 점수 못 바라냐?”
“응? 뭔데.”
입고 있던 겉옷의 주머니를 뒤지던 땡전의 손에서 나온 건 자그마한 녹음기였다.
“그 놈들 대화 담긴 거야. 내 목소리는 거의 섞여 있지 않고. 너무 아무 말 없으면 의심 사니까 쉿, 쉿 소리만 냈거든.”
“오.”
지금 들어봐도 되냐? 물론. 녹음기에 땡전이 담아 온 소리를 자세히 듣기 위해 머리통을 전부 덮고 있던 후드를 벗자, 흰 조명 아래로 왼쪽 눈의 흉터가 잠시 도드라졌다. 이거라면 압박용이든 증거로든 쓸 수 있을걸. 나도 알아, 이건 잘했네. 뿌듯한 듯 자랑하는 땡전의 말에 천둥 역시 나쁘지 않다는 짤막한 평가로 대답했다. 녹음기를 틀자 지하실 특유의 에코가 섞인 채 들렸지만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찬찬히 듣던 천둥은 어느 대목에 이르러서 잠시 일시정지를 눌렀다. 땡전은 그를 기다려줬다.
“1301호면 여기 아냐? 웬 괴담?”
“아. 그거 생뚱맞은 거 아는데 끝까지 듣지, 왜... 음. 아니다. 이건 그냥 내가 말해도 상관없나.”
이어폰을 따로 연결해두지 않아 땡전도 불과 몇 십분 전의 대화를 한 번 더 듣고 있던 중이었다. 천둥이 일시정지를 누른 부분은 내용 서로 싸우다가 시시콜콜한 얘기를 시작하던 바로 그 때였다. 근데 그놈들 꿩이었나? 참새였나? 알게 뭐람, 새대가리들. 그것보다는 어째서인지 아까까지만 해도 냉정하게 표정을 유지하던 천둥이 이상하게 목소리가 흔들린다는 느낌이 들어 그게 더 신경 쓰였다. 왜 저래? 속으로만 갸우뚱하고 만 땡전은 말을 이어갔다.
너 여기서 내가 몇 개월 지냈는지는 대강 알지? 아니 여긴 뺄셈보다는 손가락으로 세는 게 더 정확하잖아. 6, 7, 8, 9, 10. 6월 초부터 자정 넘었으니까 10월 31일, 오늘까지. 거의 반년이야. 호텔 측에서 최대한 협력할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요청해달라는 말에 너나 그 사채업자 자식이 말한 건 1301호에 내가 잠복 중이라는 걸 들키면 안 되니까 누군가가 열람하더라도 아예 알 수 있는 정보가 없도록, 여기에 대한 모든 기록을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만 없애 달라는 거였고. 뭐 여기 사람들도 신경은 무지하게 많이 썼던 모양이야. 근데 아무래도 소문은 어떻게든 나긴 나는 모양이더라고. 그래, 그냥. 그 뒤로부터 나오는 말은 별거 없어.
“그래서...”
“엉.”
“여기서 말하는 괴담의 주인공이, 땡전 너다?”
땡전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실 그 뒤에 천둥도 나오므로 괴담의 주인공은 두 명인 셈이었다. 9월이었다는 걸 봐서 그날은 아마 원래 이 상어 복면을 쓰고 있어야 할 조직원을 잡아 천둥에게 중간보고를 하고, 시행 날짜가 10월 30일 밤이라는 정보를 심문해서 알아낸 날이었다. 잡아야 하는 놈들이 자신은 물론 천둥의 얼굴까지 아는 상황에서 그 역시 함부로 살이나 얼굴이 드러나는 옷을 입을 수는 없었다. 이곳 1301호에 들어오면 바깥에서부터 가려온 얼굴을, 자신이 직접 올리는 보고를 받기 위해 후드를 벗고 드러내면 땡전은 그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
“그거 리와인드 시켜둬도 돼. 그 뒤는 뭐, 쓸데없고 뻔해서.”
“쓸데없는 건 그 괴담 얘기일 테고. 뻔한 건?”
“내가 너무 세다는 얘기.”
“잘났다.”
“더 해 봐.”
“그렇게 웃지 마, 징그러. 칭찬한 거 아니거든??”
천둥이 녹음기를 테이블에 올려두고 소파 옆 쿠션을 잡아 땡전을 향해 휘둘렀다. 호쾌하게 한 번 웃은 땡전은 쿠션이 몸에 닿기도 전에 손을 잡아 막았다. 아깐 기분 탓이었나보다. 미묘하게 떨리는 목소리에서 자신이 아는 톤으로 바뀐 천둥의 목소리가 귀로 흘러들어왔다. 인상 서늘한 미소를 시원시원하게 짓던 땡전은, 자세를 바꾸어 다리를 편하게 교차시켰다.
“그나저나, 넌 어떻게 됐어. 뭔가 나오긴 하디?”
“심증은 오지게 많았는데 물증은 없었으니까. 오늘 네가 잡은 놈들이랑 이 녹취록으로 서서히 꼬리부터 잡아가면 되겠지.”
땡전은 히터가 ‘지난번 땡전이 소탕한 밀수품의 주인들이 비돌에 좋은 감정은 안 품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보다 앞선 시점부터 이를 각오하고 있었다. 보복할 수 있는 경우의 수들을 최소부터 최악까지 생각해두고 있었다. 그리고 히터의 정보원 중 하나를 통해 듣게 된 테러 계획은 그들이 생각한 경우의 수 중 최악이었다. 이놈들은 민간인들이 휘말려도 상관이 없단 말인가? 질이 끔찍해서 분노했고, 그 끔찍한 질에 비해 시행자가 오합지졸인 말단들이었다는 것은 누가 봐도 비돌을 얕잡아본 것이 분명했기에 치가 떨렸다. 땡전과 천둥 둘은 똑같이 분노했다. 당장 쳐들어가서 끝장을 보겠다는 둘을 히터가 뜯어말렸다. 그렇게 5개월 분량의 히터의 계획은 괴담 하나를 파생시키며 호텔 안과 밖에서 진행되는 중이었다.
“인정하기 꼽지만, 히터 그 자식이 이번에도 맞았어. 이 자식들 비품 창고마저 지들 안방처럼 쓰고 다닌 데다 정직원 카드까지 늘 없었는데, 징계를 받았다는 기록이 전혀 없어. 보안이 철저해야 하는 곳인데 말이 되냐?”
“방관이구만.”
“방관이지. 그리고 묵인이야. 근데 호텔 주인은 아냐. 호텔 주인은 이번 일을 몰랐어. 그 양반 우리가 찾아가서 말한 날에 쩔쩔 매던 거 기억나? 너한테 13층 제일 좋은 방까지 제공하면서, 꼭 좀 막아달라고 부탁했던 거 생각하면...”
천둥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돌은 여전히 안정기에 접어들지 못하고 있었다. 입지를 넓히려고 바깥에서 암만 뛰어다녀도, 손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런 와중에 비돌 내부에서마저 이런 일이 터진 것에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그런 천둥의 어깨에, 크고 따뜻한 손이 턱하고 감싸왔다. 고개를 돌리면 이제는 당연하게도 땡전이 바라보고 있었다. 땡전의 눈빛을 본 천둥은 비돌로 오겠다는 날의 그를 떠올려 보았다. 땡전은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서도, 자신이 약한 모습을 보였을 때 공감하거나 걱정해주는 편은 아니었다. 늘 자신이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있으면 붙잡아서라도 끌어올리고, 저만치 날아가 버리기 전에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꽉 잡아주었다. 그때부터 늘 땡전은 한결같은 표정으로 때로는 천둥의 옆에, 때로는 뒤에 있어 주었다. 어깨에 올린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치면서 천둥이 화답했다.
“됐어. 알고 있어. 이런 때일수록 정신 차려야지. 이번 일은 시작에 불과해, 너도 나도 알다시피.”
“그래. 심란해질 것 같으면 말해라.”
“위로해줄 거야?”
“오랜만에 밤주먹 간다.”
그거 아프던데. 너무하다. 천둥은 장난스레 한 번 작게 웃고 하던 이야기를 이어갔다.
“호텔 주인은 몰랐고, 그럼 당연히 의심 가는 건 그다음으로 여기서 한자리하는 사람들이지.”
“간부진이라도 되나?”
“어, 딱 빙고. 정확하게는 그 안에서 파벌이 나뉘었던 모양이야. 그리고 여기서부터 골 때린다. 꼭 들어. 나만 지끈거릴 수는 없지.”
천둥은 쿠션을 쥐어뜯을 듯이 꽉 쥐고 있던 걸 놓고, 파일첩을 하나 가방에서 꺼냈다. 상당한 두께의 자료가 하나하나 천둥의 손에서 순서를 오가며 펼쳐졌다.
“간땡이가 쳐 부었지, 이놈들. 봐 봐. 간부진 중에서 이 사진에 있는 놈들이 문제야. 이전에 신도림 쪽이랑 접촉한 적이 있대. 비돌의 경제에서 한 몫하는 거물들이 왜 신도림을 찾겠어?”
‘굳건한 지위, 명예, 자리. 그럼에도 있던 자리를 떠난다면.’
“전향.”
“...전향의 대가로 피 묻은 돈을 요구하는 신도림이나, 그걸 좋다고 따른 이 새끼들이나. 게다가,”
천둥이 파일첩에서 흑백으로 인쇄된 사본을 꺼냈다.
“죽어도 지들이 모은 재산은 쓰기 싫었나 봐.”
“이거... 보험가입서 아냐?”
“여기 가입자 이름 봐. 그리고 이 보험은 건물 보험이고.”
“하... 그러니까, 만약 예정대로 폭탄이 터졌다면.”
“여기 호텔은 파괴되고, 이 자식들 보험금만 수령해서 그 보험금 금액을 신도림에 지불했을 거야. 책임은 호텔 오너랑 호텔 오너 쪽 파벌이 다 떠맡게 되고 비돌은 경제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깎여나갔겠지.”
호텔 창 밖에서는 하나둘 주홍빛의 광원들이 밝혀지고 있었다. 거리에는 자정이 넘었지만 오늘만큼은 어린아이들도 장난감 호박등을 들고 짝을 지어 샛노란 환호성을 지으며 돌아다니고 있었고, 건너편으로 보이는 건물 안에서는 유령이나 괴물 분장을 하고 파티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땡전도 천둥도 10월 31일이 어떤 날인지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지금 당장 둘 다 드는 감회는 똑같았다.
“야, 땡전.”
“왜.”
“그냥 가끔은... 괴담이 차라리 덜 끔찍하다고 생각이 들어.”
“끔찍하다 뿐이겠어? 지긋지긋하지.”
“진절머리난다.”
오늘 막아내지 못했으면 비돌의 거리는 즐거움 대신 비명으로 가득찼을 예정이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고, 시작이다. 앞으로 문제의 원인들을 압박하고, 심문하고, 그 결과에 따라 기회를 한 번이라도 더 줄 것인지 그 자리에서 처단을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할 것이다. 할 일은 여전히 많다. 천둥이 그렇게 앞으로 닥쳐올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면, 땡전은 자기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생각해야만 했다.
전향. 비돌로 가겠다고 천둥에게 말한 날, 천둥이 요구한 전향의 대가는 헌신이었다. 아직 안정되지 못한 비돌을 위해서 네가 뭘 할 수 있냐는 천둥의 날카로운 심문에, 땡전은 그 날 밤 비돌에게 위협이 되는 지상의 범죄조직 중 하나의 주요 거래처를 알아내어, 천둥을 데리고 그의 눈앞에서 궤멸시켰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리고 땡전은, 비돌에 완전히 자리를 잡더라도 천둥에게 그와 그의 비돌에 괘씸하게 구는 것들을 엄벌하여 선물로 선사하는 일을 끝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생각을 마친 땡전은 아직 생각에 골몰 중인 천둥의 어깨를 한번 더 잡았다. 천둥의 흉터 진 시선과 바래지 않은 눈빛이 한번 더 자신을 향했다.
“왜. 혹시 앞으로 할 일 때문에?”
“아니, 이거 때문에.”
품이 컸던 블루종 자켓의 안쪽에서 땡전이 뭔가를 꺼냈다.
“이거 가면 아냐?”
“그 놈들이 쓰고 있던 거야.”
방 안에 있던 벽난로의 위에, 흐물흐물한 복면의 안쪽을 요령좋게 펴서 하나하나 올려놓았다. 다시 보고 나서야 아, 닭이랑 비둘기였구나. 하고 깨달았다. 그치만 알게 뭐람, 새대가리들. 땡전은 천둥을 향해, 팔을 크게 벌리고 뒤돌아보았다.
“자, 천둥.”
“?”
“해피 할로윈. 인사 이거 맞지?”
“...응?”
“내가 직접 변장해서, 사탕은 개뿔 엿같은 장난이나 치려는 놈들에게 되려 장난으로 반격하고 너 주려고 가져온 것들이니까.”
“... 그럼 그게 사탕이야?”
“이건 사탕 껍질이라 치자. 알맹이는 아직도 지하에 기절한 채로 내가 단단히 묶어두고 올라왔으니 또 못된 짓거리할 염려는 없을 거야.”
“아, 야, 집어 쳐! 사탕이 너무 역겹잖아. 사탕 껍질이 디자인이 너무 구리고.”
난데없는 땡전의 할로윈 인사에 천둥이 어리둥절하다가 곧 낄낄거리며 아직 소파에 널려있던 상어 복면을 휙 던졌다. 가뿐히 받아든 땡전은 상어 복면마저 펼쳐 벽난로 위에 올려두고, 천둥의 앞으로 걸어 무릎을 꿇고 눈을 마주했다.
“뭐가 걱정이야. 곧 어마어마하게 큰 사탕들도 잡아 올 건데.”
“그것들조차 역겨울 거야.”
“그렇다고 너 혼자 앞으로 역겨운 걸 떠맡을 필요도 없지.”
“...생각해봤는데.”
“뭐?”
“그 사탕 크리스마스 때까지 가능해?”
“벌써 거기까지 생각했냐?”
“미리 정해서 나쁠 건 없잖아.”
“아 맞다. 하나 더.”
“이번엔 또 뭐...”
“나도 사탕 줘.”
“...뭐 임마?”
“난 줬잖아.”
“아니 이걸 이런 식으로 억지를 쓰냐 너는.”
“안 줄거야?”
“없어. 10월 30일 11시 30분에 보자고 네가 그랬는데 내가 할로윈의 할자도 생각을 했겠냐고.”
천둥의 당황한 어조에 땡전은 턱을 잡으며 골똘히 생각하는 척을 했다. 그러다 씨익, 하고 그가 웃은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그 웃음을 보자마자, 천둥은 어깨에 힘을 빼고 한숨을 쉬었다.
“장난칠 거구나.”
“난 아무 말도 안 했다.”
“칠 거잖아.”
“그냥 좀, 지난달에 만났을 때도 그렇고 좀 아쉬워서.”
아까 뿌듯하게 자랑하던 것도 그렇고, 요는 보상을 좀 달라는 것이었다. 돌려 말하는 예의라도 보인 게, 지난번보다는 장족의 발전인 것 같이 느껴지는 게 착각인지 뭔지 천둥도 애매했다. 헛웃음을 한번 치고, 이리 오라는 듯 천둥이 팔을 벌렸다. 그 앞에 낮게 앉아 있다, 기다렸다는 듯 벌린 팔 사이를 자신의 품과 맞물려 끌어안고 땡전이 소파 위로 엎어졌다. 그대로 입을 맞물려 마치 녹아내리는 사탕에 닿은 듯 조심스럽게, 그러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 파고들었다. 키스하는 사이사이, 서로의 숨결이 잠시 떨어질 때마다 땡전은 생각했다. 언제쯤이면 천둥도 자신도 달콤하기 그지없는 순간을 오래도록 맛볼 수 있을지, 다만 그때가 되기까지 땡전은 천둥과 썩은 것들을 같이 묻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